★ 한국전쟁, 태국과 필리핀


★ 한국전쟁, 태국과 필리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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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6.25 전쟁) 당시 대한민국을 돕기 위해 참전한 국가는 총 22개국입니다. 이들은 크게 직접 전투에 참여한 병력 지원국과 부상자 치료 등을 맡은 의료 지원국으로 나뉩니다.

상세 명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 병력 지원국 (16개국)

전투 병력을 파견하여 직접 교전에 참여한 국가들입니다.

  • 북미: 미국, 캐나다

  • 유럽: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그리스, 튀르키예(터키)

  • 아시아/오세아니아: 필리핀, 태국, 호주, 뉴질랜드

  • 중남미: 콜롬비아

  • 아프리카: 에티오피아, 남아프리카공화국

? 의료 지원국 (6개국)

병원선 파견이나 야전 병원 운영 등을 통해 의료 서비스를 제공한 국가들입니다.

  •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이탈리아, 인도, 독일

    • 참고: 독일은 전쟁 중 지원 의사를 밝히고 정전 직후 의료지원단을 파견하여 현재는 공식 의료 지원국으로 포함됩니다.





태국은 한국전쟁 당시 아시아 국가 중 가장 먼저 지원 의사를 밝힌 국가이자, 육·해·공군을 모두 파견한 핵심 우방국이었습니다. 당시 태국은 "자유와 평화를 수호한다"는 명분 아래 대규모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태국의 주요 지원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전방위적인 군사 지원 (육·해·공)

태국은 총 6,326명의 병력을 파견했습니다. 이는 당시 태국 군사력 규모를 고려할 때 상당한 비중이었습니다.

  • 육군 (리틀 타이거, Little Tigers): * 태국 제21연대는 전장에서 보여준 용맹함 덕분에 미군으로부터 **"리틀 타이거(작은 호랑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 특히 1952년 폭찹힐(Pork Chop Hill) 전투에서 중공군의 파상공세를 끝까지 막아낸 일화는 전설적입니다.

  • 해군: 프리깃함 2척과 수송선 등을 파견하여 해상 보급로를 지켰습니다.

  • 공군: 수송기 편대를 파견해 부상병 후송과 물자 수송을 담당했습니다.

2. "쌀"을 통한 인도적 지원

전쟁 초기, 식량 부족으로 고통받던 대한민국에 태국은 막대한 양의 쌀을 지원했습니다.

  • 당시 태국 정부는 쌀 4만 톤을 파견군과 함께 보내왔습니다. 이는 굶주림에 시달리던 우리 국민과 군인들에게 실질적인 생명줄이 되었습니다.

3. 전쟁 이후까지 이어진 헌신

태국군은 정전 협정이 체결된 이후에도 즉시 철수하지 않았습니다.

  • 전후 복구와 치안 유지를 위해 1972년까지 약 22년 동안 한국에 주둔하며 평화 유지 활동을 수행했습니다.

  • 이는 참전국 중 미국을 제외하고 가장 오랫동안 한국에 머무른 사례 중 하나입니다.


?? 태국군을 기억하는 곳

  • 포천 태국군 참전비: 경기도 포천시 영북면에 태국군의 용맹함과 희생을 기리는 참전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 유엔기념공원: 부산 남구에 위치한 세계 유일의 유엔군 묘지에는 전사한 태국 장병들이 잠들어 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 당시 태국 국왕이었던 푸미폰 아두냐뎃 국왕은 참전 용사들을 극진히 예우했으며, 태국인들은 지금까지도 한국전쟁 참전을 국가적 자부심으로 여깁니다.






필리핀은 태국과 더불어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한국전쟁 참전을 결정한 나라 중 하나입니다. 당시 필리핀은 제2차 세계대전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았고 내부적으로 공산 반군(후크발라합)과의 싸움으로 어려운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유 민주주의 수호"**를 기치로 내걸고 대규모 병력을 파견했습니다.

필리핀의 주요 지원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필리핀 한국 원정군 (PEFTOK) 파견

필리핀은 총 7,420명의 병력을 파견했습니다. 이는 참전국 중 5번째로 큰 규모였으며, 5개 보충대대(BCT)가 교대로 전선에 투입되었습니다.

  • 용맹한 전투 스타일: 필리핀군은 주로 험준한 산악 지형에서 유격전과 야간 기습 작전에 능했습니다.

  • 율동 전투 (Battle of Yultong): 1951년 4월, 필리핀 제10대대는 중공군 1개 사단(약 1만 명)의 파상공세를 단 900여 명의 병력으로 막아냈습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미군 제3사단이 안전하게 철수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었으며, 필리핀군의 용맹함을 전 세계에 알렸습니다.

  • 에리 고지 및 퀸 고지 전투: 전쟁 후반부인 1952년, 치열한 고지전 속에서도 끝까지 진지를 사수하며 중공군의 남진을 저지했습니다.

2. 정치적·상징적 의미

  • 아시아 최초의 파병 결정: 1950년 9월, 필리핀 의회는 "한국 파병법"을 통과시키며 아시아 국가 중 가장 먼저 지상군 파병을 확정했습니다.

  • 베니그노 아키노 2세: 훗날 필리핀의 민주화 영웅이 된 아키노 2세가 당시 17세의 나이로 종군기자로서 한국전쟁 현장을 누비며 필리핀군의 활약상을 본국에 생생히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3. 주요 전적 및 피해

  • 전적: 필리핀군은 참전 기간 동안 단 한 번의 패배도 기록하지 않았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 피해: 전사 112명, 부상 299명, 실종 16명, 포로 41명이라는 희생을 치렀습니다.


?? 필리핀군을 기억하는 곳

  • 필리핀군 참전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관산동에 위치해 있습니다. 매년 이곳에서 필리핀군 장병들의 넋을 기리는 추모 행사가 열립니다.

  • 필리핀 한·필 우정의 공원: 필리핀 본토에도 한국전쟁 참전을 기념하는 박물관과 공원이 조성되어 있어 양국의 혈맹 관계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필리핀은 전쟁 이후에도 한국의 전후 복구를 돕기 위해 기술자와 물자를 지원하며 오랜 시간 형제의 나라로서 인연을 이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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