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군의 흥망성쇠와 제식 소총들의 이야기


대한제국군의 흥망성쇠와 제식 소총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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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개항 이후 준비한 모든 군사적 체계는

1894년 청일전쟁으로 박살났음.

1894년 일본의 지원 하에 집권해 갑오개혁과 을미개혁을 밀어붙이던 개화파 신정부는 우선 기존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군사력을 증발시킴.

우선 서울을 제외한 지역의 지방군은 전부 해산되었고 수군 역시 제도 자체가 혁파되면서 조선의 군사력은 거의 공백 상태의 놓이게 됨

하지만 개화정부에 있어서도 최소한의 군사력은 필요했음. 기존의 군사력을 대부분 해산한 이유도 앞으로 조선은 무장해제하겠다는 게 아니라 일단 중구난방인 기존 군사력을 해산 후 재건하겠다는 것이었으니까.

그 결과 중앙군에는 일본의 영향하에 놓인 신식군대인 시위대와 훈련대가 설치되었음. 지방군으로는 진위대가 설치되었고.


그들이 사용한 무기로는, 일단 청일전쟁 이전에 경군이 주력으로 사용하던 미국 총인 레밍턴 롤링블럭 소총이 남아 있었음


그리고 게베어 1871도 있었음. 마우저의 음차인 모젤총이라 불렸는데, 일본측 기록에 따르면 1894년 말 조선정부가 청나라에서 1000정을 수입했다고 함.

이후로도 계속 썼나 봄. 1895년 8월 29일자 주한일본공사관 문서에 따르면 훈련대와 시위대는 모두 이놈으로 무장해 있었다고 함.

이 상태로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이 벌어지며 친일내각은 실각했고, 을미사변에 일본군과 함께 가담하여 민비를 죽인 훈련대 역시 폐지됨.

남은 시위대 2개 대대는 친위대 2개 대대로 전환되었음.

요약하자면 군사력은 공백 상태에, 그나마 있는 병력은 반역까지 벌이는 상황이었음.

그러자 고종은 민영환을 사절로 러시아에 보내어 조선군을 재건하는 것을 도와 달라 요청하고, 러시아가 여기 화답하면서 주한 러시아 군사고문단이 파견됨.

군사력 증편도 아관파천 직후 바로 시작했음. 1896년 2월 11일이 아관파천이었고, 한달이 채 되기 전인 동년 3월 3일 친위대가 5개 대대로 급격히 증편되었음.

그러자 새로이 무기를 들여올 필요가 있었음. 마침 러시아와 접근 중이었으니 자연스레 이쪽을 통해 무기를 구하게 되었는데

이때 도입된 것이 베르단 소총이었음. 1896년 5월 9일 일본공사관 문서에 따르면 러시아 측에서 3000정의 베르단과 60만 발의 탄환을 조선으로 보내 주었다고 함.

김기윤의 《타임라인 M》에 따르면 이 소총들은 오데사 군관구에서 쓰다가 모신나강으로 교체하며 남은 중고품이었다고 전해짐.

주한러시아군사고문단은 이 총으로 친위대에 러시아식 제식과 전술을 가르쳤음. 그리고 다시 친위대에서부터 시위대가 갈라져나오고 각지에 교관들을 보내 진위대를 신설하게 됨.

그리고 1897년 고종이 칭제하며 조선군은 대한제국군으로 개편되었음.

1898년, 독립협회의 반러 여론전 및 일본과의 니시-로젠 협정으로 주한러시아군사고문단이 1년 6개월만에 철수하면서 구한국군의 운영은 오롯이 한국인들의 손에 떨어지게 됨.

국방력 강화 정책은 계속되었음. 계속해서 신부대가 창설되고 증강되었음. 아관파천 직전인 1896년에는 시위 2개 대대와 진위 2개 대대 정도에 불과했지만 8년 후인 1904년에는 중앙에만 시위와 친위 각 2개 연대가 신설되어 규모만으로는 사단급에 가까워졌고

숫적 주력을 차지하는 지방군에는 진위대 6개 연대와 추가로 제주진위대대 하나가 증설됨. 결국 전국 군대는 10개 연대로 열 배 가까이 증강되었음.

여기에 헌병사령부, 호위대, 무관학교와 육군법원, 원수부와 관서사령부 등이 설치되면서 행정적 고도화도 이루어졌고, 1901년부터는 청비들을 효과적으로 진압하면서 국방능력을 조금씩 입증해갔음

그럼 규모가 그만큼 늘었으니 무기도 늘었겠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무기를 자급할 수준은 되지 못했음.

당시 대한제국에는 1887년에 가동을 시작한 삼청동의 기기창(사진)이라는 근대군수공장이 있긴 했음. 이곳은 청나라 톈진기기국에 유학해 한국 최초로 근대 기술을 배운 송경화 같은 기술자들이 운영했음.

하지만 당시 조선정부의 인식부족과 자금부족, 그리고 조선을 종속시키려던 청나라의 농간으로 인해 무기를 생산할 정도는 안 됐고 끽해야 수리하거나 탄약을 생산하는 정도였음.

칭제 이후에도 이런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는데, 이때 한 사람이 나타나 갈!을 함.

...열한째, 기국(機局)을 실시하는 문제입니다. 군부에다 포공국(砲工局)을 설치한 것은 원래 포공 기계를 제작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이 몇 해째 하나의 군기도 만들지 못하고 경비만 허비하고 있으며 지금은 폐기되어 일 없는 국(局)이나 다름없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습니까? 나라에는 군사가 없어서는 안 되고 군사들에게는 군기가 없어서는 안 되니, 비유하면 인가에서 밥을 지어 먹자면 반드시 가마와 솥, 그릇과 수저를 모두 갖추어야 하고 또 미리 장만해서 자기 집에 두고 써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옛날 기계가 이미 불편해져서 꼭 다른 나라의 기계를 써야 한다면 처음에 다른 나라에서 사다 쓰는 것은 형편상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몇 년 후에는 응당 만드는 법을 배워서 우리가 직접 본떠서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국을 설치하는 까닭입니다. 그런데 지금 만들어낸 군기는 어떤 것이며 군기 만드는 법을 아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배워서 성공하지 못하는 일은 없습니다. 막중한 군대 기물을 걸핏하면 다른 나라에서 사들이는 데만 매달린다면 한편으로는 군사 기밀이 누설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에 수모를 당하게 되며, 혹시라도 불화가 조성되어 관계가 끊어지는 날에는 속수무책이 될 것입니다. 총(銃)은 애초에 잘 만드는 사람이 없다 해도 탄환(彈丸)으로 말하면 그전에 친군영(親軍營)의 회룡총(回龍銃)과,오늘날 각 부대의 모슬총(毛瑟銃)의 탄환은 우리나라 장공인(匠工人)들이 모두 만들 수 있는 것인데 지금은 어찌하여 만들지 않고 무역에만 매달리는 것입니까? 해당 부서에 엄히 신칙하여 우선 모든 탄환을 모두 자체로 만들어 쓰게 하며 쇠를 불려서 총을 만드는 것과 같은 일은 차례로 만드는 법을 배워 자체로 만들어 쓰게 해야 할 것입니다....

1900년 4월 17일, 한국 헌병대의 아버지이자 장충단을 세웠던 육군참장(소장) 백성기가 고종에게 상소를 올려, 기계를 들여 놓고서도 무기를 만들지 못하는 현실을 신랄하게 지적했음.

이 지적은 먹혔나봐. 삼청동 기기창은 1900년부터 슬슬 설비를 증축하기 시작하고, 프랑스군 고문들을 고빙하면서 운영을 혁신하는 모습이 보임.

1901년 5월 27일자 황성신문 기사에 따르면 일종의 로켓과 방탄복을 제작해 시험하기도 하고, 1902년에는 대포 2문을 시험 생산하기도 함.

군수공장의 확대도 논의되었음. 1901년부터는 군수공장을 새로 짓는 계획이 기기창의 프랑스군 고문 페이외르 대위와 내장원경 이용익, 고종 간에 논의되는 모습이 감지됨. 이는 1903년부터 시작된 용산 군기창 계획으로 이어지게 됨.

하지만 그럼 그동안 무기는 어떻게 구했냐고? 수입이지 뭐.

우선 당시 대한제국의 외교노선은 프랑스-러시아 동맹에 가까워지고 있었음. 페이외르 대위가 기기창에서 일할 수 있던 것도 프랑스가 편의를 봐주고 있어서임

1900년 12월 28일 일본공사관 문서에 따르면, 주한프랑스공사가 대한제국에 위 사진의 그라 1874 소총을 자그마치 1만정이나 공급했다는 이야기를 볼 수 있음.

당시 일본은 한국에 대한 무기공급라인을 장악하는 것을 상당히 중요한 문제로 파악하고 있었는데, 프랑스가 이렇게 가까워지자 위기감을 느꼈나봄.

그래서 일본은 곧바로(1901년), 아리사카 30년식 소총 1만정과 탄약 100만 정 및 그 부속기자재들을 한국에 팔아치웠음.

그렇게 그라와 30년식, 두 소총은 대한제국군의 가장 주력 소총으로 쓰이게 됨.

그러던 1903년부터, 상황이 심상찮게 돌아가기 시작했음. 일본의 한국침략야욕이 점차 노골화되었고, 이에 위기감을 느낀 대한제국 정부는 군사력 강화에 더욱 박차를 가했음.

훗날 매국노가 되는 원수부 회계국장 이근택은 당시까지만 해도 친러파였는데, 러시아에 접근해 해군사관 양성계획을 준비했음

또다른 친러파이자 보부상 출신이던 내장원경 이용익은 무장중립론을 생각했음. 그는 황제의 가장 큰 지지자였던 보부상들을 모아 군에 편입시키고자 했음. 그는 이 방식으로 40개 대대를 충원할 수 있으리라 봄. 그리고 고종은 고종대로 밑에 원수부를 쪼아대면서 징병제 도입을 밀어붙이기 시작했음.

모로 보든 무기가 대량으로 필요했고, 아직 군수공장이 제대로 가동되지 않는 시점에서 다시 해외도입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음.

러일전쟁이 코앞이던 1904년 1월 22일, 일본은 영국을 통해서 지난해 한국이 프랑스를 통해 그라 소총 3만정과 100만발의 탄약을 구매하였다는 소식을 입수함

동년 9월 28일자 일본공사관 문서에 따르면 이는 자그마치 5만정이라고도 함. 어찌되었건 이는 3만에 달하는 구한국군 거의 전원을 무장시킬 수 있는 수준이었음.

수입 주체는 롱동쁠레장상회, 즉 당시 내장원경 이용익과 함께 서북 지역을 개발하며 한국에 근대화 자금을 공급해 주기로 했던 그 프랑스 회사였음.

하지만 이 소총들은 한국에 들어오지 못했음.

1904년 2월 6일, 러일전쟁이 발발했거든.

동년 12월 17일자 일본공사관 문서에 따르면 이 그라 소총들은 영국령 홍콩에서 압류당했다고 함. 이후 한국이 일본의 꼭두각시가 되면서 이 소총들은 국내에 들어오지 못했음.

대신 롱동상회는 값은 지불해달라 했고, 한국정부는 30만원을 지불함. 물건도 받지 못한 상태로 말임. 이후 1904년 북청진위대와 친위대가 강제해산되는 것을 시작으로 점진적인 군대해산이 시작됐음.

그리고 이때가 되어서야 새 군수공장인 군기창이 완공됐음. 창장은 일본에서 기계공학을 익히고 돌아온 인물이자 독립운동가 김경천의 아버지인 포병부령(중령) 김정우였음.

1903년, 당시까지만 해도 비교적 친일적이었던(반역적 친일파는 아님) 군부대신 신기선이 일본의 미쓰이 물산과 함께 용산에 짓기 시작한 공장임.

하지만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1905년 6월경이 되어서야 완공된 이 공장은 당연히 제대로 운용되지 못했던 것으로 보임.

원래 계획대로라면 총 5개의 생산라인에서 총포, 화약, 탄환, 가죽장구와 군복을 생산하기로 되어 있었음. 해군용 화약도 포함해서 말임.

하지만 중간에 전쟁이 터지며 계획은 감축, 총포와 탄약만을 생산하는 것으로 줄어들었음

어쨌건 용산 군기창을 건설한 기술자 이노우에 요시후미에 따르면, 완공된 군기창은 하루에 30년식 소총 10정과 탄약 3000발을 생산할 능력이 있었다 함.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운용되지 못했음

군기창은 1906년 이후로도 한동안 방치되었다가 1906년 3월 18일이 되어서야 30년식 소총을 시험 생산한다는 기록이 등장하고

동년 4월 24일부터는 민간대상 영업을 실시함. 1907년 7월 18일부터는 기술자 30명을 추가 모집한다는 광고를 신문에 냈고 말임.

하지만 곧이어 대한제국군이 아예 해산되면서 군기창 역시 기능을 정지했고

그동안 한국군이 가지고 있던 모든 무기들은 일본이 장악, 폐기하게 됨.

다만 일부의 무기들은 탈영한 구한국군 장병 및 무기고를 탈취한 의병에 의해 한말의병전쟁에 사용되기도 했음.

출처

한국 근대 사료 DB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타임라인 M

대한제국의 군사제도

1903~1904년 대한제국의 대러시아 대응론과 정책의 추이

대한제국기 일본인 기술자 이노우에 요시후미(井上宜文) 연구

등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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