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오군란은 단순 군납비리와 부패한 조정으로 발생한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임오군란을 민씨 일가의 부정부패와 함께 발생한 비리로 인해서 구식군인들이 들고 일어난 난으로 생각함
물론 그게 이유가 아예 아니라고는 할 수 없으나 임오군란 안에는 생각보다 많은 이면과 문제점이 있었음
우선 임오군란이 벌어진 1882년 이전의 조선 정부는 사실 안 망한게 더 이상할 지경의 상태인걸 인지해야함
쌀값 폭등이랑 재정난이 당시 조선 정부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였음
우선 당시 조선 정부는 그냥 돈이 없었음 뭐 세간에 알려진 임오군란의 배경이라고 설명하는 글들을 보면 지도층이 사치에 빠졌다느니 이런 소리도 자주 나오는데 이건 사실도 아니었고 주된 원인이라고 보기 어려운 수준이었음
그냥 당시 한성부에 쌀값이 폭등하니깐 별의 별 소문이 와전되고 그러면서 만들어짐

일단 임오군란의 가장 큰 원인이 재정난으로부터 기인함 얼마나 재정난이 심각했냐면 당시 중앙 정부 부처중 통리기무아문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굴러가는곳이 없을 정도였음 물론 대원군이 집권했을 시기에는 주조 차익으로 재정을 건전화 시키면서 자금을 어느정도는 비축해놨는데 대원군이 실각후 개화정부가 어설프게 디플레이션 정책을 강행하면서 국가의 자금력과 자금줄이 말그대로 말라 비틀어짐
여기서 알아야할게 당시 군인들의 월급 체계가 현금으로 지급했었고 사실 이때만 하더라도 수도로 들어오는 물류 유통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구동이 되던 시절이라 물가가 안정이 되어있었고 덕분에 국가에서 군인들인 중앙군에게 현금을 지급하더라도 군대가 정상적으로 잘 유지가 되던 시절임
그러다가 이후에 대원군이 실각되면서 새로 들어선 개화정부가 중앙군에게 지급하는 현금을 쌀로 바꿔버렸는데 이게 개화정부의 디플레이션 정책과 상통함
물론 당시 쌀도 훌륭한 현물 화폐라서 주는거 자체는 문제가 안됨
그러나 조선의 유통시스템이 무너지면서 이야기가 달라짐

조선초기지만 물류 운송시스템 참고용으로 올림
우선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 수도인 한성의 인구가 50만에 달하면서 기존의 운송 시스템으로는 이 50만에 달하는 인구를 커버를 못하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발생함
80년대 중후반이야 조선 정부가 기선이든 지토선이든 기존 물류 운송과 차원이 다르니 유지가 되었는데 80년대 초반에는 글 초반에 말한거처럼 디플레이션 정책으로 인해 조선 정부 자체가 돈이 없었음, 뭐 돈이 있어야 기선을 구매를 하던지 임대를 하던지 하지 기존의 범선이나 풍등선 같은거로는 턱없이 모잘랐음
당시 전라도에서만 쌀이 80만석이나 생산이 되었는데 수도로 올라오는것은 고작 1.6만석뿐이었고 수도 내 쌀값 폭등으로 인해 불안은 심각해졌고 그런 와중에 경강상인들이 중간에서 농간질을 하면서 상황은 급속도로 악화되었음
당시 조선 상인들 분포도
오죽하면 당시 정부 대신들이 경강상인들 조질까 하겠음
-신이 호남 고을에서 벼슬할 때에 뱃사람들의 말을 들어 보니, ‘위로 대내(大內)의 상공(上供)으로부터 아래로는 성 안 억만 백성들이 먹는 곡식에 이르기까지 모두 경강(京江) 선박의 운송에 의지하고 있다. 그런데 근래로 공납에 관련된 뇌물이 해마다 늘어나고 달마다 늘어나고 있으며, 또한 선주(船主)라고 불리기만 하면 역시 불법적인 침해를 수없이 당하고 있기 때문에, 강인(江人)들이 다시는 배를 만들지 않음으로써 부유하다는 이름을 피하고 있다. 오직 궁예(宮隷)의 족속이나 존귀한 벼슬아치의 하인들이 단지 체문(帖文)을 도모하여 간혹 배를 빌리거나 임대를 하기도 하는데, 싣고 떠날 때에 간혹 다른 고을의 묵은 포흠곡이라고 보고 하기도 하고, 아니면 혹은 술 마시고 도박을 하는 데 쓰기도 하고, 다른 여러 가지 잡비로 써서 이미 축난 것이 많으면 고의로 배가 침몰한 척하기도 한다. 때로는 배가 낡아도 고치지 않고 침몰시키는 자도 있고, 혹은 배가 패선했다고 칭탁하지만 실제로는 귀속되는 자가 있는 경우도 있다.-
-이어 생각건대, 각사에서 모든 공납을 담당하는 아전과 노비들이 분주한 명에 지쳐 모두 도망치고자 하여 부모, 형제, 처자식이 뿔뿔이 흩어지는 데 이르고, 또 훈련도감을 혁파한 이후로 5천 명의 군사가 심한 추위와 굶주림에 고통을 당하고 있으니, 그들이 흩어져 도둑이 되는 것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이는 모두 재정의 고갈로 인해 발생한 일입니다. 근자에 듣자니, 천 명밖에 안 되는 군대를 조련하는데도 군량미의 부족으로 고통을 겪어 원망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는 이웃 나라에 알려져서는 안 될 일입니다.-
당시 조선은 5천의 훈련도감 병력에게 제대로 급료를 주지 못하고 있었고 오죽하면 정부도 일본으로부터 쌀을 수입해서라도 수도 내 불안을 감소 시키고 쌀값을 안정화 시키려고 했겠음
-조선정부의 재정은 임오군란(1882)을 전후하여 위기상황에 빠져들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슬프게도 개화정부의 뻘짓인 디플레이션 정책으로 조선 정부에 돈이 없었음.. 돈이 있어야 사치를 부리든 뭘 하든 하는데 그냥 돈이 없었음
전라도의 법성창도 고종 17년인 1880년 이후 2년 동안 납부하지 못한 세곡이 거의 1만석에 달하였고 그 다음해인 1881년에는 경상도 좌창인 진주 가산창의 조선 9척이 충청도 홍성 연해에서 한번에 침몰해서 세금 수천석이 날라가는 대참사가 일어남
이런 악재들이 겹치고 또 겹치니 수도의 물가상승은 어마어마했고 경강상인들의 트롤이 겹쳐지면서 수도로 들어오는 운송 매개체를 경강이 아닌 각 도의 지토선들로 대체하자는 의견이 대두될 정도였으니 상당히 심각한 상황이었음
그나마 각 영들은 자체적으로 광산 같은것들으 갖춰서 자금을 어느정도 자체 조달을 하고 있었으나 5위영이 2영제로 대체되면서 무위영에 많은 것들이 집중되기 시작하니 훈련도감과 같은 편제들은 아오안이었음
결국 내외부적으로 겹쳐진 악재들은 하나의 거대한 사고를 만들었고 이런 비상시국은 결국 임오군란이라는 거대한 일이 발생함
급료병들에게 줄 쌀이 없고 도성 주민들 조차 쌀을 사먹기 힘든 시절인데다가 고위 관료들 조차 녹봉을 깎는 시점인데 군대에게 줄 쌀이 있을리가...
이런거처럼 임오군란의 배경에는 상당히 심오하고 복잡한 배경과 이면들이 숨겨져 있었는데 우선 1880년도 초기에 일어난 심각한 재정위기가 있었다는 것을 알아두어야 함